본문 바로가기
와인 바이블

미국의 와인

by 노자극 2024. 6. 4.

 

 

갤럽 조사에 따르면, 최근 25년 사이에 미국의 와인 소비량은 3분의 1 이상 껑충 뛰었으며 미국인의 약 30%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잔의 와인을 마시고 있다. 미국인들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선호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소비하는 모든 와인의 4분의 3 이상이 미국산이다. 한편, 미국의 와이너리 수는 20여 년 사이 3배로 늘어나 이제 그 수가 7000개를 넘어섰으며,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50개 주 전역에서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미국 와인의 지배력이 이토록 높은 것을 감안하면 잠시 미국의 와인 양조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미국에서의 와인 산업을 '신생'산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 뿌리를 짚어보면 약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초창기 와인

 순례자들과 초기 개척자들은 미국에서 발을 디딘 초반기부터 식사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는 것이 습관화되어 황무지애서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매우 기뻐했다. 검소하고 자립적이던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품종들 (주로 비티스 라브루스카)을 보고는 직접 와인을 만들 수 있겠고, 비싼 유럽산 와인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생종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를 수확한 뒤 최초의 미국 와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빈티지 풍미는 유럽의 포도로 빚은 와인과는 완전히 달리 무척 실망스러운 맛이었다. 결국 유럽에서 비티스 비니페라종 포도나무의 꺾꽂이용 가지를 주문하면서, 수백 년 전부터 세계 최상급 와인을 만드는 데 쓰여온 품종인 비티스 비니페라를 들여오게 되었다. 주문한 지 얼마 후 꺾꽃이용 어린 가지들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개척자들은 힘들게 번 귀한 돈으로  구입한 새 품종의 포도나무를 정성껏 심고 길렀다. 미국의 토양애서 자란 유럽산 포도로 만들어진 첫 와인을 손꼽아 고대했다. 하지만 들인 정성이 무색하게도 제대로 자란 유럽산 포도나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포도나무가 시들시들하다 죽고, 살아남은 나무도 열매를 거의 맺지 못했다. 그나마 얻은 빈약한 수확량으로 와인을 만들어 보았으나 아주 형편없었다. 초기 개척자들은 추운 날씨를 탓했으나,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들여온 유럽의 포도나무들이 신대륙의 식물병과 해충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해충과 질병에 대한 현대의 방제법을 이용했더라면 바티스 비니페라종 포도는 오늘날과 같이 잘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 200년 동안 개량 없이 그대로 혹은 자생존과의 교배를 통해 비티스 비니페라종을 정착시키려는 식으로 시도가 이어졌고 매번 실패로 끝났다. 북동부 및 중서부의 재배자들은 달리 방법이 없자, 다시 북아메리카 자생 포도나무인 비티스 라브루스카를 심음으로써 소규모 와인 산업을 겨우겨우 이어나갔다.

 결국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 와인이 선호되었다.

 미국에 와인  산업을 정착시키려는 초창기 사도가 실패로 끝난 데다, 수입 와인의 비싼 가격까지 더해지면서 와인 수요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후 미국인의 취향은 점차 바뀌어 식사에 와인이 같이 나오는 경우는 몇몇 특별한 날로 제한되었고, 와인이 전통적으로 차지해 온 자리를 맥주와 위스키가 대신 꿰차게 되었다. 

 

>>와인의 서부 입성

 서부의 와인 생산은 스페인 사람들이 시초였다. 스페인 정착자들이 멕시코에서 북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부터 가톨릭교가 같이 따라왔다. 초창기 선교회는 단순한 교회 이상의 역할을 해서, 남서부와 태평양 연안에서의 스페인 식민지 주민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자급자족적 방어 시설이나 다름없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이 초창기 정착자들은 스스로 식량과 옷을 구하고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와인도 직접 주조했는데 이는 주로 교회에서 쓰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의 교회의식에서 와인은 특히 중요한 것이었고 와인 수요가 늘자 스페인인이 멕시코로 들여온 포도나무를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들여왔다. 캘리포니아에서 이 나무는 온화한 기후 덕분에 잘 자라났다. 이로써 소규모이긴 했으나 진정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이 산업다운 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180"년대 중반에는 양질의 와인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계기가 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 사건은 1849년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였다. 골드러시에 이끌려 유럽과 동해안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와인 양조 전통도 함께 가져왔던 것이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했고, 이내 양질의 상업용 와인을 생산해 냈다.

 두 번째 사건은 1861년에 일어났다. 캘리포니아주 주지사가 경제성장의 측면에서 포도 재배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오거스톤 하라즈시에게 유럽에서 비티스 비니페라종 중 리슬링, 진판델, 카베르내 소비뇽, 샤르도네 같은 대표적인 포도나무의 꺾꽂이용 가지를 선별하여 수입해 오라고 지시했다. 하라즈시는 유럽으로 가서 포도나무 10만여 그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 품종들은 잘 자랐을 뿐만 아니라 양질의 와인을 생산해 냈다. 이로써 캘리포니아의 와인 양조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이 번창하던 1863년, 유럽의 포도원들에 곤경이 닥쳤다. 미국의 동해안이 원산지로 포도 작물에 치명타를 입히는 해충 필록세라가 유럽의 포도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록세라는 실험 목적으로 수출된 미국 자생 포도나무들의 꺾꽃이용 가지에 붙어 들어온 것이었는데 포도나무의 성장에 파괴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 후 20년에 걸쳐 필록세라는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유럽의 포도밭을 황폐화시켰고 유럽의 와인 생산은 대폭 감소했다. 그것도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던 시기에 말이다. 

 결국 캘리포니아가 세계에서 유럽종 포도로 와인을 생산하는 유일한 지역이 되면서 와인 수요가 치솟았다. 덕분에 캘리포니아 와인계의 대규모 시장 두 부문이 일약 성장세를 타게 되었다. 그 하나는 저렴하면서도 마실 만한 좋은 와인을 대량 생산하는 부문의 시장이었고 또 하나는 더욱 고품질의 와인을 구비한 시장이었다.

 캘리포니아는 이 두 가지 요구에 모두 대응했다. 1876년에 이르자 캘리포니아는 매년 870만 리터 이상의 와인을 생산했다. 그중에는 주목할 만한 품질의 와인도 더러 있었다. 캘리포니아는 어느덧 세계 와인 양조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그해에 필록세라가 캘리포니아에 들이닥쳤다. 캘리포니아에 당도한 필록세라는 유럽에서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수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죽어나가면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재정적 파탄을 맞았다. 당시의 필록세라병은 현재까지 가장 파멸적인 작물병의 사례로 꼽힐 만큼 위력이 대단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주들에서는 라부르스카농 포도로 만든 와인을 계속 생산해 냈고, 덕분에 미국의 와인 생산이 전면 중단되는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유럽의 와인 메이커들은 수년간의 연구 끝에 치명적인 필록세라에 내성이 있는 라브로스카종 포도나무의 접본에 접붙이는 데 성공함으로써 와인 산업을 구한 것이다.

 미국인들도 이러한 선례를 따랐고, 그 뒤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재기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그 어떤 때보다 더 좋은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800년대 말경 캘리포니아 와인은 국제적인 경쟁에서 상을 획득하면서 세계의 관심과 감탄을 자아냈다. 이것은 불과 300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금주법, 또 한 번의 역경

 1920년 미국의 수정헌법 제18조가 제정되어  미국의 와인 산업에 또 차례 역경이 닥쳤다. 전국금주법, 일명 볼스테드법이 발효되면서 음주 목적으로는 주류를 제조, 판매, 운송, 수입, 수출, 배달,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13년간이나 시행된 이 금주법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번성해 가던 산업이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볼스테드법에는 예외 규정이라는 허점이 있었다. 즉, 성찬용 와인의 제조 및 판매는 허용되었으며, 의사의 처방만 받으면 의료용으로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었고, 강장제용 와안 (주정강화 와인)은 처방전 없이도 구입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보다 더 치명적인 허점이라면 과일즙이나 사과즙은 누구나 매년 약 750리터까지 생산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이었을지 모른다. 과일즙은 더러 농축액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와인 양주용으로는 이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포도 농축액을 구입해 동해안 지역으로 수송하곤 했는데 이런 수송 컨테이너 위쪽에는 크고 굵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찍혀 있었다. 

 "주의! 당분이나 효모, 기타 발효를 일으킬 만한 것은 뭐든 첨가를 금함."

 이 중 일부가 미국 전역의 밀조자들에게 흘러들어 갔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밀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가 개입하여 포도즙 판매를 금지하면서 불법적인 와인 생산을 봉쇄했기 때문이다. 결국 포도 재배자들은 포도 재배를 그만두었고, 이로써 미국의 와인 산업은 중지되고 말았다.  한편, 주정강화 와인, 즉 의료용 강장 와인은 알코올 함량 20% 정도로 보통 와인보다 증류주에 더 가까웠고, 금주법 시행 중에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제일 잘 팔리는 와인이 되었다. 미국의 와인이 빠르게 대중화된 데는 그 맛보다는  효과가 큰 몫을 했다. 와이노 Wino(와인 중독자)라는 말도 대공황 중에 생겨난 것으로 시름을 덜기 위해 주정강화 와인에 기댔던 불운한 영혼들을 지칭하던 이름이었다.

 금주법은 1993년에 폐지되었으나 여파는 수십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금주법 폐지 무렵 미국인들은 양질의 와인에 대하여 관심을 잃었다. 금주법 시행 동안 전국에서 수천 에이커 상당의 우수한 포도나무들이 갈아엎어졌다. 전국 곳곳의 와이너리들이 폐업하면서 와인 양조 산업이 쇠했으며, 버티고 살아남은 곳은 주로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소재한 소수에 불과했다. 동해안 지배자들 대부분은 포도주스 생산 쪽으로 돌아섰다. 

 1933년부터 1968년까지 포도 재배자들과 와인 메이커들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한 양질의 와인을 생산해 낼 동기가 없었다. 그래서 와인을 그저 항아리형 병에 담아 값싸고 별 특징 없는 '저그 와인'을 대량 생산했다. 더러 몇몇 와이너리에서, 특히 캘리포니아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양질의 와인을 생산하기도 했으나 이 시기에 생산된 미국 와인은 대부분 별 특징도 없는 그저 그런 와인들이었다.  금주법으로 미국의 와인 생산자 대다수가 타격을 입었으나 성찬용 와인을 만들며 버텨낸 곳들도 있다. 베린저, 보리우, 크리스천 브라더스가 금주법 시행 기를 용케 견뎌낸 몇 안 되는 와이너리다. 이 와이너리들은 금주법이 시행되는 동안에도 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던 곳들보다 유리했다. 연방정부는 금주법을 폐지하면서 알코올 판매와 운송에 대한 권한을 주정부에 일임했다. 그런데 몇몇 주는 그 통제권을 카운티, 더러는 심지어 시당국에 넘겨주었다. 이 방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시 혹은 카운티마다 통제권 보유처가 다르다.

'와인 바이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캘리포니아 와인 기초상식  (0) 2024.06.09
미국 와인의 르네상스  (0) 2024.06.09
와인 시음하기  (0) 2024.06.04
와인의 향과 풍미 3대 요소 - 숙성  (0) 2024.06.03
와인의 향과 풍미 3대 요소 - 발효  (1) 2024.06.03